맨위로가기

사나다 주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나다 주조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와카야마 현립 가이초 고등학교 시절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1943년 프로에 데뷔하여 1956년까지 투수로 활약하며 178승을 기록했다. 1950년에는 39승으로 다승왕을 차지하고 사와무라상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스포츠 평론가와 해설자로 활동했으며, 메이세이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도쿄 오리온스, 한큐 브레이브스, 긴테쓰 버펄로스 등에서 코치를 역임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199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쇼치쿠 로빈스 선수 - 나카타니 준지
    나카타니 준지는 쇼치쿠 로빈스, 한큐 브레이브스,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1950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은퇴 후에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코치로 활동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이다.
  • 쇼치쿠 로빈스 선수 - 고즈루 마코토
    고즈루 마코토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서 쇼치쿠 로빈스에서 일본 프로 야구 최초로 시즌 50홈런을 기록하고 MVP를 수상했으며, 은퇴 후 코치와 스카우트로 활동했고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와카야마현 출신 야구 선수 - 요시미 유지
    요시미 유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지바 롯데 마린스, 한신 타이거스에서 활약했으며 2002년 신인왕 경쟁과 월간 MVP를 수상했고, 2015년부터는 DeNA의 타격 투수로 활동했다.
  • 와카야마현 출신 야구 선수 - 후쿠시 히로아키
    후쿠시 히로아키는 일본 프로 야구와 KBO 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80년 일본 최고 승률, 1983년 KBO 리그 30승 및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으나, 은퇴 후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되는 불운을 겪은 일본 돗토리현 출신 야구 선수이자 코치이다.
  • 오사카 타이거스 선수 - 요시다 요시오
    요시다 요시오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뛰어난 수비와 공격 능력을 인정받아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고, 은퇴 후에는 한신 타이거스 감독을 맡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 오사카 타이거스 선수 - 무라야마 미노루
    무라야마 미노루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 해설가로, 한신 타이거스에서 '미스터 타이거스'라는 칭호를 얻으며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고, 그의 등번호는 영구 결번으로 지정,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사나다 주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나다 주조
출생일1923년 5월 27일
출생지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사망일1994년 5월 30일
신장173cm
체중73kg
타석우타
투구우투
선수 경력
포지션투수, 3루수
프로 입단 연도1943년
첫 출장1943년 4월 4일
마지막 출장1956년 9월 30일
선수팀아사히군 (1943)
퍼시픽 (1946)
다이요 로빈스 (1948)
쇼치쿠 로빈스 (1950 ~ 1951)
오사카 타이거스 (1952 ~ 1956)
감독/코치 경력
감독/코치팀메이세이고등학교
도쿄 오리온스 (1964 ~ 1965)
한큐 브레이브스 (1966 ~ 1971)
긴테쓰 버펄로스 (1978 ~ 1981)
수상
노히트 노런2회 달성
명예의 전당 헌액1990년 (경기자 표창)

2. 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야구 경력

사나다 주조는 와카야마 시내에서 과일 가게를 하던 집안의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1] 와카야마 시립 후키아게 소학교, 와카야마 고등 소학교를 거쳐 1938년 가이초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시마 세이이치의 3년 후배가 되었다.

가이초 고등학교 시절, 처음에는 1루수와 포수를 맡았으나[1], 시마 세이이치가 졸업한 후 투수로 전향하여 메이지 대학 OB인 하세가와 노부요시 감독의 엄격한 지도 아래 에이스로 성장했다. 1939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 3루수, 5번 타자로 출전하여 팀의 전국 제패에 기여했다. 1940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하며 가이초 고등학교의 2연패를 이끌었다. 1941년에는 메이지 진구 중등 야구 대회에서 우승하며 가이초 고등학교의 3연패를 달성했다. 1942년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는 만 19세 미만 출전 규정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지만, 가을 메이지 진구 중등 야구 대회에서 다시 우승하여 4연패를 달성했다.

3. 프로 야구 선수 경력

1943년 아사히군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는 가이초 고등학교 시절의 활약에 주목한 아사히군 오너 다무라 고마지로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1] 니혼 대학 오사카 전문학교(현 긴키 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었으나, 학도로 간주되어 1943년 가을 학도병으로 출전하여 해군에 입대했다. 따라서 전쟁 이전의 실적은 1943년 시즌뿐이었다.

해군에서는 항공대를 지원했으나 탈락하여 1944년 6월에 요코스카 통신 군단에 배속되었는데, 이곳에서 시마 세이이치와 재회하게 되었다.[3] 1944년 9월에 시마와 사나다는 와카야마와 유라 항구의 기이 방비대에 배속되었으나 2달이 안 되어 사나다가 특수 잠항정 요원으로 이시카와현에 배속되어 종전을 맞이했다.

1946년에 다무라 고마지로가 새롭게 설립한 퍼시픽에서 프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속구와 '겐가의 드롭'을 무기로, 1946년부터 1948년까지 3년 연속 20승을 거두었다. 1946년 5월 26일 그레이트 링스전에서 4실점 완투 승리를 거두었지만, 퍼시픽 감독 후지모토 사다하루가 이 경기에 등록이 인정되지 않았던 후지이 이사무를 출전시킨 것으로 인해, 이 경기가 몰수 경기(9-0으로 그레이트 링스의 승리)가 되어, 사나다의 승리 투수가 취소되었다. 게다가 사나다는 더위와 혹사로 체력이 떨어졌는지, 1946년 7월 20일 오사카전에 선발 출전하여 3회 도중 9안타 6실점으로 녹아웃되었다. 더욱이 다음날인 21일 한큐전에서도 선발 등판하여 완투했지만, 22안타 13실점으로 2일 연속으로 맹타를 맞았지만, 이 경기에서 맞은 22피안타는 NPB 최다 기록이 되었다.[4]

1948년 9월 6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는 1리그 시대 마지막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는데, 이는 NPB 사상 최초의 무사사구 경기였다.[6]

1950년에는 39승을 올리며 최다승을 획득하고, 사와무라상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서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으나, 5차전에서는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9] 1951년에는 혹사로 인한 팔꿈치 부상으로 24경기 등판(7승 6패)에 그쳤다. 시즌 후 오사카 타이거스로 이적했는데, 다무라 고마지로는 구단 경영에서 실적이 악화되자 구단 내에서 입지를 잃었고 이적은 다무라가 모르는 곳으로 결정되었다.

1952년 5월 7일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개인 통산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1] 현역 말년에는 내야수로 출장했다. 1954년 7월 25일 주니치 드래곤스(오사카 스타디움) 전에서는 팀이 3점을 뒤진 10회말 대타로 출장해 삼진을 당했으나 3스트라이크 째에서 파울 팁이 된 공을 포수가 낙구하자 감독인 마쓰키 겐지로후지무라 후미오의 격렬한 항의로 그라운드에 팬들이 난입하면서 결국 한신의 포기 경기가 되었다.

1956년 후지무라 배척 사건에서 배척파의 일원이었다.[1] 1956년 12월 4일 구단에서 가네다 마사야스와 함께 "다음 시즌 계약 갱신을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구단 측은 12월 25일에 가네다를 복직시켰으나 사나다는 "힘이 쇠약해져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정책을 변경하지 않았고, 사나다는 그대로 구단을 탈퇴했다. 사나다 본인은 후일 "(구단과의 중개를 맡았던 외부인으로부터) 가네다도 돌아갈테니 너도 돌아오라는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프로 통산 178승은 고시엔 대회와 프로 야구 계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했던 선수 중에서는 2012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최다 승리이다. 구와타 마스미가 이 기록까지 5승을 남겨두고 있었으나 2007년을 끝으로 미국으로 이적했다 은퇴를 하면서 그대로 남게 되었다.

3. 1. 아사히군·퍼시픽·타이요 로빈스·다이요 로빈스·쇼치쿠 로빈스 (1943, 1946~1951)

사나다 주조는 1943년 아사히군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는 가이초 고등학교 시절의 활약에 주목한 아사히군 오너 다무라 고마지로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1] 니혼 대학 오사카 전문학교(현 긴키 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었으나, 학도로 간주되어 1943년 가을 학도병으로 출전하여 해군에 입대했다. 따라서 전쟁 이전의 실적은 1943년 시즌뿐이었다.

해군에서는 항공대를 지원했으나 탈락하여 1944년 6월에 요코스카 통신 군단에 배속되었는데, 이곳에서 시마 세이이치와 재회하게 되었다.[3] 9월에 시마와 사나다는 와카야마와 유라 항구의 기이 방비대에 배속되었으나 2달이 안 되어 사나다가 특수 잠항정 요원으로 이시카와현에 배속되어 종전을 맞이했다.

1946년에 다무라 고마지로가 새롭게 설립한 퍼시픽에서 프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속구와 '겐가의 드롭'을 무기로, 1946년부터 1948년까지 3년 연속 20승을 거두었다. 1946년에는 5월 26일 그레이트 링스전에서 4실점 완투 승리를 거두었지만, 퍼시픽 감독 후지모토 사다하루가 이 경기에 등록이 인정되지 않았던 후지이 이사무를 출전시킨 것으로 인해, 이 경기가 몰수 경기(9-0으로 그레이트 링스의 승리)가 되어, 사나다의 승리 투수가 취소되어 버린다. 게다가 사나다는 더위와 혹사로 체력이 떨어졌는지, 7월 20일 오사카전에 선발 출전하여 3회 도중 9안타 6실점으로 녹아웃된다. 더욱이 다음날인 21일 한큐전에서도 선발 등판하여 완투했지만, 22안타 13실점으로 2일 연속으로 맹타를 맞았지만, 이 경기에서 맞은 22피안타는 NPB 최다 기록이 되었다.[4]

1948년 9월 6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는 1리그 시대 마지막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는데, 이는 NPB 사상 최초의 무사사구 경기였다.[6]

1950년에는 39승을 올리며 최다승을 획득하고, 사와무라상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서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으나, 5차전에서는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9] 1951년에는 혹사로 인한 팔꿈치 부상으로 24경기 등판(7승 6패)에 그쳤다.

3. 2. 오사카 타이거스 (1952~1956)

1951년 시즌 후 오사카 타이거스로 이적했다.[1] 이적은 다무라가 모르는 곳에서 결정되었다. 1952년 5월 7일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개인 통산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1] 같은 해는 16승, 방어율 1.97(리그 3위)를 거두며 부활했다. 현역 말년에는 내야수로 출장했다. 1954년 7월 25일 주니치(오사카 스타디움) 전에서는 3점을 뒤진 연장 10회말 대타로 출장해 삼진을 당했으나 3스트라이크 째에서 파울 팁이 된 공을 포수가 낙구하자 감독인 마쓰키 겐지로후지무라 후미오의 격렬한 항의로 그라운드에 팬들이 난입하면서 결국 한신의 포기 경기가 되었다.

1956년 후지무라 배척 사건에서 배척파의 일원이었다.[1] 12월 4일 구단에서 가네다 마사야스와 함께 "다음 시즌 계약 갱신을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구단 측은 12월 25일에 가네다를 복직시켰으나 사나다는 "힘이 쇠약해져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정책을 변경하지 않았고, 사나다는 그대로 구단을 탈퇴했다. 사나다 본인은 후일 "(구단과의 중개를 맡았던 외부인으로부터) 가네다도 돌아갈테니 너도 돌아오라는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프로 통산 178승은 고시엔 대회와 프로 야구 계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했던 선수 중에서는 2012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최다 승리이다. 구와타 마스미가 이 기록까지 5승을 남겨두고 있었으나 2007년을 끝으로 미국으로 이적했다 은퇴를 하면서 그대로 남게 되었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사나다 주조는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12]도카이 라디오 방송의 초대 프로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12] 1960년부터 오사카 메이세이 가쿠인 중학교·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아 1963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었다.[13] 이는 고시엔 우승 투수가 우승 감독이 된 첫 번째 사례였다.[13] 사나다는 당시 주류였던 근성 야구와는 달리 선수들에게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하고,[14] 타순에 따라 역할을 부여하는 등 효율적인 지도를 했다.[14]

1964년 프로 야구계에 복귀하여 도쿄 오리온스의 코치를 맡았다.[15] 이후 한큐 브레이브스긴테쓰 버펄로스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한큐에서는 3연패를 포함한 4번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1979년 긴테쓰의 첫 우승에도 코치로서 공헌했다.[16] 특히 한큐 시절에는 투수를 쏟아 부으려는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을 제지하기도 했다.[16]

199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말년에는 보이즈 리그 팀의 감독을 맡아 약소팀을 전국 대회에 출전시키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1994년 5월 30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1950년 MVP 논란

나카노 하루유키의 저서 "구단 소멸, 환상의 우승 팀 로빈스와 다무라 고마지로"에 따르면, 1950년 시즌 쇼치쿠 로빈스의 오너인 다무라 고마지로는 최우수 선수(MVP)가 사나다 시게오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사나다에게 "만약 MVP를 차지하게 된다면, 고즈루 마코토에게는 내가 상금을 지급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사나다를 염려한 것이었으나, 사나다가 "만약 MVP를 고즈루가 차지하게 된다면 상금은 내가 받는 것인가?"라고 묻자 다무라는 긍정했다.

이후 일본 시리즈에서 패배한 뒤, 고즈루 마코토가 최우수 선수로 발표되자 사나다는 "최우수 선수가 되지 못하면 사장이 상금을 주겠다고 말했다"라고 팀 동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이는 팀 내 파문을 일으켰고, 감독 고니시 도쿠로에게는 "일본 시리즈 중에 다무라로부터 돈을 받았다"라고 왜곡되어 전달되었다.

고니시 도쿠로의 회상록 "하고 싶은 질문"에서는 시리즈 전에 MVP가 고즈루로 정해져 다무라가 사나다에게 "그보다 더 이상을 해줄 것이다(돈을 주겠다)"라고 말한 것을 사나다가 다른 선수들에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스즈키 류지는 회고록에서 "일본 시리즈 중(일본 시리즈 이전이라고 쓴 곳도 있음)에 고즈루가 MVP인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다무라가 사나다에게 돈을 전달했고, 이로 인해 팀이 와해되어 시리즈에서 패배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실제 최우수 선수 발표는 일본 시리즈 종료 후인 11월 30일이었기 때문에, "일본 시리즈 전 또는 도중에 MVP가 정해졌기 때문에 다무라가 사나다에게 돈을 건네는 이야기를 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6. 상세 정보

6. 1.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사나다 주조는 다승왕 1회(1950년), 최다 탈삼진 1회(1946년, 당시에는 타이틀이 아님), 베스트 나인 2회(1948년, 1950년), 사와무라 에이지상 1회(1950년)를 수상했다. 199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 2. 개인 기록

사나다 주조는 1948년 9월 6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대 오사카 타이거스 전과 1952년 5월 7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대 히로시마 카프 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두 차례 달성하였다. 1948년에 기록한 노히트 노런은 1리그제 마지막 노히트 노런이었다. 또한, 1946년부터 1948년까지 3년 연속으로 20선발승 이상(1946년 22선발승, 1947년 21선발승, 1948년 23선발승)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최고 기록이다.

1950년에는 시즌 다승 39승을 기록하여 NPB 역대 4위이자 센트럴 리그 기록을 세웠다. 1946년에는 시즌 투구 이닝 464 2/3이닝을 기록하여 NPB 역대 3위이자 전후 최다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시즌 최다 실점(202점), 시즌 최다 자책점(163점), 시즌 최다 피안타(422개)를 기록하며 NPB 기록을 세웠다. 1946년 7월 21일 대 한큐전에서는 1경기 최다 피안타(22개)를 기록하며 NPB 기록을 세웠다. 1946년 5월 26일 대 그레이트 링전에서는 몰수 게임으로 인해 승리 투수 기록이 소멸되었다.

6. 3. 선수 경력

사나다는 1943년 아사히군에 입단했다. 1946년부터 1951년까지는 아사히군, 퍼시픽, 타이요 로빈스, 다이요 로빈스, 쇼치쿠 로빈스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는 오사카 타이거스 소속이었다.

6. 4. 지도자 경력

메이세이 고등학교를 거쳐, 1964년부터 1965년까지 도쿄 오리온스 코치를 맡았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는 한큐 브레이브스 코치를, 1978년부터 1981년까지 긴테쓰 버펄로스 코치를 역임했다.

참조

[1] 서적 日本プロ野球 歴代名選手名鑑 恒文社 1976
[2]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
[3] 서적 球団消滅―幻の優勝チーム・ロビンスと田村駒治郎
[4] 서적 球団消滅―幻の優勝チーム・ロビンスと田村駒治郎
[5] 서적 球団消滅―幻の優勝チーム・ロビンスと田村駒治郎
[6]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
[7] 서적 20世紀のプロ野球名選手100人
[8] 서적 消えた球団 松竹ロビンス1936~1952
[9] 서적 消えた球団 松竹ロビンス1936~1952
[10] 뉴스 観衆なだれ込み逮捕者も…阪神対中日2千試合 歓喜と感動の裏にあった“黒歴史”「騒乱の大阪球場ナイターに断」 https://www.chunichi[...] 中日新聞社 2021-05-12
[11] 서적 真虎伝
[12] 웹사이트 猛虎人国記(65)~和歌山県(中)~ 39勝に3割の豪傑 真田重蔵 https://www.sponichi[...]
[13] 웹사이트 大阪・明星 公立勢に対抗した「私学の雄」 http://www.zakzak.co[...] SANKEI DIGITAL 2011-10-29
[14] 웹사이트 商売人の「ボンボン」たち、プロ流の指導で甲子園V 明星 https://www.asahi.co[...]
[15] 서적 20世紀日本人名事典
[16] 서적 阪急ブレーブス 光を超えた影法師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
[17] 서적 したいざんまい 実業之日本社 1957
[18] 서적 プロ野球と共に五十年 恒文社 1984
[19] 서적 プロ野球を創った名選手・異色選手400人
[20]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
[21]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
[22] 뉴스 日대지진, 巨人 역사도 바꿨다…개막 연기 확정 https://sports.news.[...] 이데일리 2020-04-14
[23] 뉴스 日대지진, 巨人 역사도 바꿨다…개막 연기 확정 https://sports.news.[...] 이데일리 2019-11-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